내가 막 어른(Adulthood)이 다 될무렵 만나게된 어떤 형이 있었다. 형을 처음 만났을 때 형의 나이는 지금 내 나이와 비슷했다. 그 때 형이 지금 나보다 훨씬 멋있었다.
취미도 많고 아는 것도 다양한, 대화하면 몇시간이고 재미있는 얘기를 들을 수 있는 형이었다. 그만큼 감정의 스펙트럼도 넓어서 즐거움과 슬픔을 그대로 느끼고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잘 표현하고 성찰하는 형이었다.
나는 그 형이 쓰는 단어들을 유심히 듣는 것을 즐겼는데, 지금도 형으로 인해 그때 열렸던 생각들을 돌아보면 참 고맙다. 지금도 Intentions/Welcoming/False-Self 이런 단어들에 대해 (잘은 모르지만) 듣던 시절이 그립다. 수녀원에 가서 기도하는 것도 형에게 배웠다.
형의 삶이 늘 평탄하던 것 만은 아니었고, 영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힘든 기간도 있었다. 그 기간을 통과하면서 나는 형이 가졌던 힘든 시간을 다 알지 못한다. 그렇지만 형이 나에게 해준 말이 하나있는데 지금까지 내 신앙의 깊은 뿌리가 되었다.
형이 해준 말은 토요일의 영성에 대한 것이었다.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금요일과 부활하신 일요일 사이에 토요일이 있다는 아주 단순한 생각이었는데, 그 토요일에는 아무런 희망도 소망도 느낄 수 없는 시간이라는 것이다.
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없는 시간을 주시고 그 ‘토요일’의 기간 안에 있는 우리가 할수 있는 건 충분히 아파하고,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을 다 받아드리고, 그 캄캄함 안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라는 것 이었다.
(형이 설명한 걸 아직도 잘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, 내 우물은 아직도 깊지 않다).
나는 그 이후로 형이 얘기해 준 토요일을 수십번 지나갔다. 하나님은 내가 쉽게 그분을 느끼거나 체험하도록 무엇인가 보여주시지 않았고, 내가 할수 있는 것이라곤 어딘가에 있을 하나님을 향해 깜깜함 속에서 기도하는 것이었다. 영적인 갈급함은 계속 커졌고, 그 안에서 조금씩 하나님을 더 알아갔다.
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그 시간 안에 신비하게도 하나님은 없음을 통해 나와 함께해 주셨다 (이건 말도 안된다고 얘기하겠지만 사람의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이다).
형은 그 길을 먼저 걸어갔고, 캄캄함을 알고 있었으며, 내가 그 안에서 하나님을 찾길 원했던 것 같다. 형이 알려준 토요일을 지금도 지나가며, 그립고 고맙다.